2018 올해의 사진
되돌릴 수 없는 한 걸음
4월27일 오전 9시29분. 북쪽 판문각 문이 열렸다. 참모진과 경호원을 대동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문을 열고 등장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서 있는 판문점 군사분계선까지 걸어서 1분이면 충분했다. 드디어 마주 선 두 사람. 문 대통령이 말했다. “지금 위원장께서는 남쪽으로 내려오시는데 나는 언제쯤 넘어갈 수 있을까요?” 김 위원장이 즉석에서 받았다. “그럼 지금 넘어가 볼까요?” 70여 년간 남북을 갈라놓았던 판문점 군사분계선은 높이 5㎝, 너비 50㎝에 불과했다. 그 누구도 함부로 넘을 수 없던 철벽이었다. 남북의 두 지도자가 손을 잡자 마치 마법의 주문에서 깨어난 것처럼, 볼품없는 콘크리트 구조물이 보이기 시작했다.이날 김 위원장은 인사말에서 “여기까지 역사적인 자리까지 11년이 걸렸는데 오늘 걸어오면서 보니까 왜 이렇게 시간이 오랬나, 왜 오기 힘들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멀다고 하면 안 되갔구나”라는 그의 말은 유행어가 되었다. 5개월 뒤, 9 · 19 평양 공동선언에는 ‘서울을 거쳐 워싱턴으로 가겠다’는 김 위원장의 각오가 담겼다. 아직까지 협상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고 있다. 김 위원장이 올해 안에 서울을 방문하고 그 여세를 몰아 2차 북 · 미 정상회담까지 진행한다는 장밋빛 청사진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모든 일정이 내년 초로 미뤄졌다. 미국의 대북 제재도 한 원인이지만 미 · 중 관계를 활용해 자국에 유리한 형태로 핵 위기를 돌파하려던 애초 구상이 깨진 후유증에서 북한이 아직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분명한 것은 이제 외길뿐이라는 점이다. 시간도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물론 해법은 있다. 4 · 27 판문점 회담 당시의 ‘도보다리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과연 김정은 위원장은 어떤 결단을 내릴까?
봄날
남과 북은 남북관계의 전면적이며 획기적인 개선과 발전을 이룩함으로써 끊어진 민족의 혈맥을 잇고 공동번영과 자주통일의 미래를 앞당겨나갈 것이다(제1조). 남과 북은 한반도에서 첨예한 군사적 긴장 상태를 완화하고 전쟁 위험을 실질적으로 해소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해나갈 것이다(제2조). 남과 북은 한반도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하여 적극 협력해나갈 것이다(제3조). - 4 · 27 판문점 선언 중에서
이거, 실화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그리 쉬운 길은 아니었다. 우리한테는 우리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고, 또 그릇된 편견과 관행들이 때로는 우리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다. 우린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왔다.”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발언
8000만의 열망
“평양 시민 여러분, 동포 여러분, 우리 민족은 우수합니다. 우리 민족은 강인합니다. 우리 민족은 평화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함께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5000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습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지난 70년 적대를 완전히 청산하고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한 평화의 큰 걸음을 내딛자고 제안합니다. 김정은 위원장과 나는 북과 남 8000만 겨레의 손을 굳게 잡고 새로운 조국을 만들어나갈 것입니다. 우리 함께 새로운 미래로 나아갑시다.” - 문재인 대통령, 평양 능라도 5 · 1경기장 연설
‘도망하는 강’에서 김구의 꿈 영글까
1895년 동학접주였던 김구 선생이 갑오농민전쟁에 참전했다 패한 뒤 남만주로 피신하면서 만난 함경도는 결코 오지가 아니었다. 황해도나 평안도보다 오히려 교육열이 더 높았다. 초가집만 있는 동네에서도 서재(글방)와 도청(공용 사랑방)만은 기와집이었다. 작은 마을에 선생을 셋이나 모신 곳도 있었다. 대륙으로 활짝 열린 관문 두만강을 머리에 인 덕분이었다. 한반도에 평화가 깃들면 앞다퉈 열릴 후보지 중 하나이다. 일제시대 ‘도망하는 강’이었던 이곳에서부터 통일을 열망했던 김구 선생의 꿈이 다시 영글 수 있을까.
몸도 마음도 가로막는 철조망
모래알 하나에서 세상을 보고, 들에 핀 한 송이 꽃에서 우주를 본다. 너무나 낯익어 그 자리에 있는 줄도 몰랐던 한 오라기 철사 가닥이 한반도를 남북으로 나누고, 세계 냉전체제의 진영을 가르는 뾰족한 창끝이다. 서로를 국가가 아니라고 했으므로 이것은 국경이 아닌 군사분계선(MDL), 이것은 전쟁이 아닌 비무장지대(DMZ)의 중무장한 평화다. 어느새 내 머릿속, 내 가슴에도 가로놓인 철조망은 몸도, 마음도 ‘여기까지!’라며 한계(Limit Line)를 긋는다. 장벽(障壁) 아닌 철책(鐵柵)이기에 몸은 넘을 수 없어도 시선의 월경은 막을 수 없다. 그 눈길 닿는 곳마다 새로운 평화의 길이여, 열려라.
아직, 도착하지 못한 편지
다음을 기약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을 버릴 수가 없다. 차림을 정제하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어제 헤어진 양 ‘그날’을 말하는 까닭이다. 자신의 생 안에 북쪽 가족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해도, 유춘희씨는 딸의 딸에게라도, 신중현씨는 아들의 아들에게라도 가닿을 수 있길 바라며 지난 삶의 이야기를 꾹꾹 눌러 담는다. 끝인사는 비슷하다. ‘그때가 마지막인 줄 모르고 짜증내서, 제대로 얼굴도 안 보고 나와서, 안아주지 못해서, 사랑한다 말 못해서 미안해.’70년 가까이 피붙이를 보지 못한 이산가족은 남한에만 13만3000여 명. 이 가운데 2018년 11월까지 숨진 이가 5만6000여 명이다.
이제는 북으로 가야 할 시간
판문점 선언에 희망과 절망을 왕복하는 사람들. 한반도의 분단과 분단정치는 끝내 이들을 배신할 것인가? 남과 북 위정자들은 모두 2차 송환에 대해선 일절 말이 없고, 서옥렬 선생을 비롯한 생존해 있는 송환 신청자 18명은 벙어리 냉가슴을 앓듯 숨죽인 채 상황을 지켜볼 뿐이다. 살인, 강도, 강간, 사기범도 아니면서 인생의 절정기를 송두리째 감옥에서 보내고, 숱한 고문으로 망가진 몸에 일가친척도 없이 말년을 지탱하고 있는 이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도 이미 충분히 대가를 치렀으니 ‘집’으로 보내달라는 요구가 지나치다면 평화도 통일도 민주도 복지도 모두 개뿔 같은 소리다.
한반도기의 지독한 역설
깃발 속 한반도는 한 덩어리의 푸른색이다. 현실은 깃발과 다르다. 휴전선은 지구에서 유일하게 남은 20세기식 냉전의 경계선이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은 전쟁으로 치닫던 한반도의 항로를 단숨에 바꿨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종착역에 도착하지 않았다. 한반도에는 평화와 핵이, 정상회담과 세습 독재가, 교류와 제재가 중첩돼 있다. 역사적인 해의 끝자락에서, 평창의 한반도기를 다시 바라본다. 한반도기는, 그것이 현실이어서가 아니라 지독한 역설을 담고 있어서 진정으로 흥미로운 깃발이 된다. 그람시는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고 했다. 지금 한반도를 두고 한 말처럼 들린다.
날개 없는 비행
한때 무용한 경쟁을 비웃으며 ‘병림픽’이라는 말을 빗대던 이들이 있었다. 장애인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이 말이 “이겨도 져도 결국 장애인”일 뿐이라는, 패럴림픽에서 비롯되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무술(戊戌)년 그들이 말한 ‘병림픽’이 이 땅에서 열렸다. 날개(양팔) 없이도 강력한 중심의 무게로 활강하는 선수의 얼굴을 조롱할 사람은 없을 터이다. 사실, 그 겨울 평창이 남긴 것은 선수들의 얼굴뿐일지도 모른다. 그 밖의 많은 말과 행위는 텅 빈 퍼포먼스로 남은 2018년이었다. 날개를 잃으면 목숨도 잃었다.
BTS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방탄소년단의 기록 행진이 계속된 한 해였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고 이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한국 가요사에서 대형 팬덤의 지지를 받은 아이돌 그룹이야 많았지만 이만큼 전 세계적인 파급력을 가진 이들은 없었다. 국가적 자랑거리로만 생각하려 하면 이들 팬덤의 초국적성을 놓칠 수 있다. 세계는 갈수록 주제별로 파편화되고 있으며, 방탄소년단은 그런 세계를 제법 아우를 수 있는 공통 화제다. 이런 주제가 점차 줄어들고 있는 시대라 의미 있는 존재다. 내년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양한 영역에서 방탄소년단이란 주제를 말하게 될까?
4 · 3, 기억은 썩지 않는다
기다려라, 곧 돌아오마던 당신. 뒤돌아보니 사라진, 아직도 안 보이는 그대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차마 어떻게 쏘랴 했다지. 하나 된 나라를 소망하던 꿈은 죄였고, 모든 울음이 죄였다지. 집단 광기, 광풍이 휩쓸던, 70년 전 불지옥의 섬. 설레던 새색시의 밤은 붉은 바다였고, 떠나간 당신을 일 년 또 일 년 기다리던 여인들, 속삭이듯 건네던 늙은 위로. “살암시민 살아진다”던 당신들도 세상을 뜨네. 반세기 국가 공권력이 강요한 망각과 오도의 이름 제주4 · 3. 자욱한 섬의 트라우마는 언제쯤 걷힐 것인가. 언 땅속에 누운 자들은 말하지. 보라. 기억이 썩지 않는 한, 진실은 썩지 않는다. 우리가 증거다. 4 · 3 속에 인간이 인간에게 묻는 물음이, 답이 있다. 4 · 3은 70년을 이렇게 건너가고 있다. 산 자들의 부르튼 기억 싸움. 마침내 처연하게 아름다운 섬의 가슴에 붉은 동백 하나씩 단단하게 심어놓고.
신부님이 하늘을 바라보는 까닭
하늘을 바라보는 것, 그것은 희망일 수도 있지만 절망일 수도 있다. 바닥을 바라보는 것, 그것은 죄책감일 수도 있지만 상관없음일 수도 있다. 그래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응원해야 한다.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희망의 무거움을, 바닥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부끄러움의 가벼움을. 솜털처럼 가벼운 흔들림의 날들이다. 흔들리지 않으려는 친구의 흔들림을 응원할 것이다. 구름의 한쪽 귀퉁이를 자르고 달아나는 상상력을 응원할 것이다. 친구의 슬픔이 느리게 올라오기를 바랄 것이다. 응시할 것이다.
학살, 그 후
사람 눈도 짐승 눈처럼 빛난다는 거 알아유? 그날 총 겨눈 태극단원 흘낏 쳐다봤다가 소스라쳤다니께. 눈에서 시퍼런 불기둥이 튀는디… 그런 걸 살기라 하나 싶었소. 감나무집 네 살 난 막내가 귀신 나온다고 우는 걸 어미가 달래다가 태극단 청년에게 짓밟히는 걸 본 뒤에는 아무도 울음소리 하나 못 내고 파들파들 떨다가 속절없이 갔지유. 몸으로 총알 받고 얼굴에 흙 쏟아졌지유. 누구는 극락왕생 빌더라만 다 소용없고, 나는 그저 귀신 되길 빌었시유. 해코지를 하고팠던 게 아니유. 그냥 누구 꿈속에라도 들어가서 우리 여기 묻혔다고 말해주고 싶었시유. 말이 안 나오면 내 가슴팍 끄집어내서 손톱으로 피나게 긁어서라도 알려주고 싶어서 그랬시유.
갈 데까지 갔던 막말 끝판왕
지금이야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나는 수능 시험에서 수학은 당시 내 나이에도 못 미치는 점수를 받았다. 한국 정치권력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의 모습은 내 수학 점수를 확인한 부모를 떠올리게 한다. 심지어 엄마 아빠가 텔레파시로 주고받던 대화마저도 닮은 것 같다. “당신이 설레발을 쳐대서 이렇게 된 거 아냐?” “내가 그렇게 했으니까 그나마 이거라도 받은 거야!” 위기의 순간, 우리 가족의 평화를 지켜준 조언을 사진 속 두 분에게도 전해드리고 싶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담임선생님 말씀이다. “목표를 낮추면 모두가 행복해집니다.” 어쩌면 대한민국이 행복해질지 몰라요.
결국 감옥에 갔습니다
이명박은 갔습니다. 아아, 이명박 전 대통령은 3월22일 감옥에 갔습니다. 시민들의 환호와 가족의 눈물을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4대강, 자원 외교, 방산 비리 등 빛나던 혐의는 방어하고, ‘다스는 누구 겁니까’라는 미풍에 날아갔습니다(그 바람은 <시사IN> 제519호 ‘MB 프로젝트’에서 시작됐습니다). 구치소로 향하기 직전, 그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남겼습니다. “누굴 원망하기보다는 이 모든 것은 내 탓이라는 심정이고 자책감을 느낀다.” 10월5일, 1심 공판에서 징역 15년에 벌금 130억원을 선고받으니 마음이 달라졌는지 2심에서는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 측근 22명을 법정에 불러 따지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직접 비자금 의혹을 보도한 저를 고소했습니다. 아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감옥에 갔지만 저는 그를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보수는 정장을 입는다
약속이나 한 듯 구두는 검은색이었다. 말끔히 차려입고 도착한 곳은 서울역 광장. 평창 올림픽이 아니라 ‘평양 올림픽’이 될 위기였다. 북한 예술단 점검단이 서울역에 도착하자 인공기 화형식이 열렸다. 허술한 종이가 금세 타올랐다. 준비해둔 소화기로 불길을 잡았다. 소화기에서 나온 분말이 기껏 다려 입은 정장 바지와 검은색 치마에 내려앉았다. 타고 남은 잿가루도 구두 뒤축 어딘가에 남아 있다가 이들과 함께 귀가했다.
다카기 마사오 점프
폭염에 철갑 뒤집어쓴 채 불구덩이에 처박힌 내 기분을 너희들이 알아? 주인공이 초반에 고통받고 각 잘 재고 무릎 딱 바닥에 처박듯 만주군관학교 졸업하고 남로당 가입하고 체포되고 무기징역 살다가 다시 복귀해서 쿠데타 일으킨 것도 원래 청춘만화 빡세게 찍듯 계획대로 되어간 거지. 보라. 죽은 뒤에도 내 살과 뼈를 그리워하는 자들을. 넘어지고 쓰러져도 내 인생은 길고 내 영화도 길어. 원래 청춘만화의 핵심은 클리셰, 그래야 독자가 안심하는 법이지. 그 독자들을 위해 오늘도 나는 폭염에 철갑을 뒤집어쓴 채 불구덩이에 처박혀 있다. 이게 다 내 계획이다. OK 계획대로 되고 있어.
신지예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짜릿했다. 또래 여성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 페미니스트와 서울시장이라는 당연하지만 낯선 단어 조합이. 신지예와 눈 마주친 사람들은 그 안에서 무언가 깨지는 것을 느꼈을 터이다. 그것이 비뚤어진 남성성이든, 젊은 여성은 정치인이 될 수 없다는 편견이든. 이 포스터 이후 나는 정치를 하고 싶어졌다. 할 수 있겠다는 이상한 믿음이 생겼다. 길에서 이 포스터를 본 어린 친구들은 더 빨리 내가 갖지 못했던 꿈을 키워갈지도 모른다. 나는 신지예를 보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어느 지역구에 출마하면 좋을지 종종 꿈꾸게 되었으니.
어느 새벽, 노회찬이 봤던 장면
새벽 4시 ‘6411번’ 버스에 올랐다. 여느 통근 버스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낯익은 이들끼리 가벼운 농담이 오갔다. 분위기가 바뀐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강남의 한 백화점 앞에서 내리는 이들의 낯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허리가 굽고 어깨는 작아졌다. 버스 승객이 청소 노동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어느 새벽 고 노회찬 의원도 봤던 장면일 것이다. 노 의원은 ‘6411번 버스를 아십니까?’라는 연설에서 이들을 ‘투명인간’이라고 불렀다. 정치는 수많은 투명인간들의 고단한 삶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새벽 버스를 찾는 정치인이 다시 나올까? 이름 없는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고통을 드러낸 이가 2018년 떠났다.
“그동안 힘들었지? 고생 많았다”
수능을 보고 나온 청소년들이 이런 말을 들었으면 좋겠다. “그동안 힘들었지?” “고생 많았어.” “괜찮아.” 어느 누구도 수능 점수로 비난받거나, 어른들이 정해놓은 룰에 의해 자기 가치를 훼손당하는 느낌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세상이 그렇지 않으니까,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어른들이 더 많으니까 어쩌면 마음이 다칠 일이 많을지 몰라. 그 상처가 자신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줬으면, 자기 자신을 다정하게 대해줬으면, 누구도 위로해주지 않더라도 그 시간을 지나온 자기 자신을 위로해줬으면 좋겠다. 아주 먼 미래의 일로 불안해하거나 과거의 자신을 누구보다도 앞장서 비난하느라 지금의 이 시간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많이 웃고, 사랑하고, 경험하는 이십 대가 될 수 있기를.
우린 왜 바닥을 기어야 하지?
늘 궁금해. 왜 나의 불행은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 더 값이 나가는지. 왜 내 삶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힘이 든다”고 말하는지. 내가 그렇듯 모두에겐 힘든 순간들이 있겠지. 그리고 모두에게 그렇듯 내게도 좋은 순간이 있어. 내 장애는 그 자체로 불행이 아니고, 내 불행도 그 자체로 문제는 아니다. 그럼 도대체 문제가 뭐냐고 묻고 싶겠지. 문제는 불행이 아니라 불평등이다. 우리 다 같은 인간이라 했잖아. 그런데 왜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나는 네가 한 번도 기어본 적 없는 바닥을 기어야 할까. 바닥에 기는 것은 나일까, 아니면 2018년의 인간 그 자체일까. 나는 늘 궁금해.
공포와 혐오의 눈길이 난감한 사람들
1951년부터 세계는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을 맺으며 ‘난민’에 대한 정의를 공유했지만, 우리에게 이 단어는 2018년 5월이 되어서야 실체가 되었다. 나는 알 수 없었다. 터키 해변으로 떠밀려온 시리아 아이의 시신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사람들 속에 내전을 피해 제주로 온 예멘인들을 혐오와 공포의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포함됐는지 아닌지를. 전 대통령 탄핵을 염원하던 사람들과 예멘인들을 추방하라는 사람들은 똑같이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왔는데, 그들이 같은 사람들인지 아닌지도. 국가 코드가 찍힌 신분증이 있어도 정규직과 아파트를 갖지 못했다면 조금씩은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다행인지 아닌지도, 나는 진정 알 수 없었다….
한없이 웃음을 닮은 사랑
성소수자 부모모임의 회원 자격으로 대구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한 정은애씨(54)가 자신의 아이를 소개한다. “저희 아이는 트랜스젠더로 젠더퀴어, 바이젠더, 팬로맨틱, 에이섹슈얼이에요.” 성별 정정 수술과 법적인 정정 절차를 진행 중인 이한결씨(24)는 어머니가 자신을 소개하는 모습을 보며 눈시울이 붉어진다. 어떤 사랑은 한없이 눈물을 닮아 있다. 1973년 미국 정신의학회는 동성애를 정신과 병명에서 제외했다. 올해 세계보건기구(WHO)는 1990년 ‘국제질병분류(ICD)’ 발간 이후 약 30년 만에 트랜스젠더의 성정체성을 ‘정신질환’으로 분류했던 항목을 모두 삭제했다.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퀴어들은 ‘병적인 존재’로 치부된다.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퀴어퍼레이드 행렬은 번번이 혐오 세력에 의해 멈춰서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퀴어들은 또다시 거리에 선다. 스스로가 질병이나 징후가 아니라 단지 자신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한 명의 온전한 존재로서 살아 숨 쉬고 사랑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뙤약볕이 내리쬐는 거리에서 서로를 껴안고 춤을 춘다. 기꺼이 축제를 벌인다. 그렇게, 어떤 종류의 사랑은 한없이 웃음을 닮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맞잡은 손의 시간
만 24세의 비정규직 발전 노동자 김용균씨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 긴 시간이 걸렸다. 컨베이어벨트에 말려 들어가 머리와 몸이 분리되었다는 처참한 얘기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무릎이 꺾였다. 노동자의 신체를 분리할 수 있는 권리를 자본은 언제 얻은 걸까. 노동의 가치가 아니라 노동자의 값어치를 계산하는 일을 자본은 누구에게 허락받았는가. 김용균씨의 생전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았다. 합이 ‘21년’이라는 투쟁의 시간은 노동자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생의 시간이었을까, 죽음의 시간이었을까. 두 사람이 맞잡은 손과 연결된 눈빛과 가슴에 꼭 붙어 있는 노란 리본은 증명한다. 우리의 피해 사실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아들의 동료들은 안전하게 늙기를…
빈소는 2교대로 돌아갔다. 주간 근무가 끝난 사람들이 돌아오면 야간 근무를 하러 가는 사람들이 일어섰다. 컨베이어벨트에 삽이 휘말려 들어갈 뻔했던 순간을 이야기하다가, 용균씨가 컨베이어벨트 아래로 고개를 넣어야만 했던 이유를 말해주다가, 그들은 그곳으로 출근하기 위해 일어섰다. 하청업체 이름이 박힌 일회용 그릇에 담은 쌀밥과 육개장은 먹어도 허기가 졌다. 어머니 김미숙씨의 바람은 아들의 동료들이 안전하게 늙어가는 것이다.
환하고 평평한 세계로
가끔 코아리빙텔 317호를 생각한다. 2평 남짓, 기본 옵션 침대, 책상, 옷장. 317호의 문은 복도 끝의 비상구 문과 직각으로 만났다. 비상구 문 밖에는 딱 한 사람이 설 수 있는 간이 베란다가 있었다. 거기에 선 채로 위치에너지라는 단어를 떠올리곤 했다. 발판 하나를 경계로 공중에 서 있자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동시에 가장 약한 존재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 방을 떠나 여러 해가 지나서도 여전히, ‘위치’와 ‘에너지’의 관계는 물리학보다는 마법이나 주술에 가깝게 느껴진다. 사회적인 위치를 대신해 물리적인 위치를 변경할 수밖에 없는 일, 목소리 낼 곳을 찾던 이가 끝내 좁고 높은 곳을 디뎌야만 하는 일은. 환하고 평평한 세계에서, 생존이 아닌 생활이 약속되기를. 모두의 안녕을 바란다.
늦은 악수
11년 전엔 괴담이었다. 국내 일류 기업 공장에서 일하다가 사람이 죽고 병을 얻었다는 외침은 ‘말’이 되지 못했다. 듣는 사람이 하나둘 생겨나면서 ‘말’의 형태를 얻었다. 삼성 직업병. 반올림, 황상기, 김시녀, 한혜경…. 세상일에 조금만 관심이 있으면 누구나 아는 시사용어가 된 단어들. 가장 늦게 알아들은 건 삼성이다. “내 딸을 살려내라”는 아비에게 처음엔 500만원을, 산업재해 역학조사가 시작되자 10억원을 내밀던 ‘검은 손’이 삼성전자-반올림 중재판정 이행합의 협약식을 치르는 ‘하얀 손’으로 돌아왔다. 1023일 노숙 농성을 마치던 날, 한 반올림 활동가는 울먹이며 외쳤다. “이렇게 해결할 수 있는 걸 왜 지금까지 안 했던 거죠?”
4600여 일을 견딘 당신의 출근
이 당연한 일상을 맞기 위해 왜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 생각하다가 당신은 문득 울 수도 있을 것이다. 복직을 위해 견딘 13년, 4600여 일의 시간이, KTX 해고 여승무원들의 투쟁의 역사가 당신의 출근길에 고여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오늘도 출근한다. 당신은 일을 한다. 당신이 당신의 오늘을 만들었다.
삼성의 표정
2월5일 뇌물 혐의 등에 대해 유죄를 선고받았으나 집행유예로 서울구치소를 나섰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결코 밝지 않은 그의 표정은 시민들의 성향에 따라 다른 느낌으로 해석된다. ‘국가 경제에 대한 기여가 투옥으로 돌아온 억울함’ 혹은 ‘국정 농단 부역이란 큰 죄로도 처벌에서 면제되는 금수저의 뻔뻔함’. 저 표정의 이중성은 삼성과 한국 경제의 이중성이며 모순이다. 부자 세습의 봉건적 그룹 시스템에서 글로벌 최첨단 산업이 성공적으로 육성된 모순. 세계의 강고한 경제 강국 중 하나인 한국이 시민들에겐 ‘헬조선’일 뿐인 모순. 모순의 해결을 더 이상 뒤로 미룰 수 없다는 것이, 이 부회장에게 녹음기와 마이크를 들이민 기자들의 간절하고 열정적인 표정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삼성 일가는 그 답변을 새해엔 어떤 형식으로든 내놓아야 한다.
동료가 떠난 자리
3월31일 밤, 서울 이마트 구로점 24번 계산대에서 일하던 계산원 권 아무개씨(48)가 가슴 통증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지나던 고객이 심폐소생술을 했다. 10여 분 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심정지로 숨졌다. 다음 날인 4월1일, 권씨와 10년을 함께 일한 계산원은 권씨가 쓰러진 24번 계산대에서 영업 종료 시간까지 일을 해야 했다. 4월2일 동료들은 그 자리에 국화를 올렸다.
굴뚝 위의 절실함 오체투지의 간절함
달과 별이 방향을 잡는다. 지쳐 있는 등을 바람이 밀어 세워 하루를 버티게 한다. 폐까지 밀고 들어오는 연기는 더 큰 호흡의 중요함을 일깨우고, 절망을 비워낸 그 공간만큼 내일의 시간으로 채워 간신히 균형을 맞춘다. 겨울나무처럼 휘었던 시간. 뿌리가 들썩이고 나뭇잎마저 모조리 떨어져 가지까지 부러진 시간. 그러나 뽑히지 않는 뿌리 부여잡고 악착같이 버텨온 시간이었다. 별처럼 하늘에 박힌 굴뚝 노동자들의 하늘 좌표도, 몸뚱아리 하얀 백묵 삼아 검은 아스팔트 위에 써 내려가는 글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우리는 굴뚝 아래에서 400일을 살아가고 있구나. 눈물이 내장 가득 고였던 시간. 굴뚝은 소리 없는 마음의 번화가다.
하늘 나는 노동자, 땅에서 정의 외치다
촛불을 든 어나니머스(anonymous)…. 작자 불명의, 개성 없는, 이름을 모르는, 성격이 뚜렷하지 않은. ‘당당하면 가면을 벗으라’는 말은 얼마나 나이브하고 폭력적인가. 그들은 하늘을 나는 사람이지만, 또한 항공사의 직원이었다. 야맹으로 맞이하는 적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물을 드리우는 엄혹한 조직의 일원이었다. 민주노조를 결성할 수 없었던 시간 동안 그들은 유니폼 아래 몰개성한 회사원이 되기를 강요받았지만, 이제 땅 위에서 말한다. 하늘을 나는 노동자, 구름 밖으로 멀어지는 환상의 빛이 아닌, 사람들이 날리는 종이비행기의 모양으로.
이겨낼 수 없는 강제징용의 무거움
사라진 시계, 사라진 창, 사라진 문… 사라진 거울 앞에 두 손과 발을 모으고 앉으면 되살아나는 공포, 수치심, 굶주린 얼굴들, 썩은 콩깻묵 냄새, 설사, 벌거벗은 등짝을 후려치던 가죽 채찍, 하늘이 노래지도록 퍼 담아도 줄지 않던 석탄…. 가마이시 제철소로 징용 끌려갈 때 나이가 열일곱, 올해 아흔다섯. 쇳덩이 같은 얼굴을 들고, 사라진 거울을 말끄러미 응시하며 울먹인다. “나 혼자… 혼자 남아… 마음이 아프고 서운하다….”
여기까지 4년
하늘이 파란 5월이다. 바람이 불지 않는 듯 옅은 구름이 게으르게 흩어져 있다. 배는 침몰된 상황과 마찬가지로 왼쪽으로 누운 채로 인양되었다가 4년 만에 드디어 바로 서려고 하는 중이다. 기중기와 선체를 연결하는 철근은 배의 무게를 지탱하느라 팽팽하다. 바닷물에 녹이 슨 갑판은 배가 바닷물 속에 잠겨 있던 시간을 말해준다. 왼쪽으로 기울어지는 배의 반대편 선창에 얼굴을 대고 구조 요청을 했던 사람들. 비명과 분노와 증오와 절망의 목소리들을 삼켜버렸던 배. 모자 위에 안전모를 덧쓰고 머리카락을 뒤로 묶은 사람이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품이 큰 청바지를 입은 그의 등에는 ‘잊지 않겠습니다, 행동하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노란 망토가 둘러져 있다. 망각하는 순간 행동도 멈춘다. 이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찍으려는 그의 마른 손은 떨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선연리의 비극을 아십니까
평택시 대추리와 성주군 소성리를 기억하는 사람도 군산시 옥서면 선연리는 알지 못한다. 선연리도 올여름 여섯 마을을 미군 기지로 내주었다. 대추리와 소성리처럼 울부짖지 않았기 때문일까? 선연리의 비극에는 다들 침묵했다. 미군 기지가 확장되면서 선연리 여섯 마을에서 547가구가 고향을 떠났다. 하제마을도 그중 하나다. 너무 오랫동안 들어와서 비행기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는 하제마을 어촌계장은 이제 잠을 못 자게 될까, 아니면 잘 자게 될까? 저문 강에 무기를 씻는 풍경을 우리는 언제쯤 보지 않게 될까. 하제마을의 마지막을 기록한 이재각 사진가는 “확장에는 멈춤이 없고, 소멸에는 책임이 없다”라는 문장을 수첩에 남겼다.
전선과 전선
그들은 무채색 옷을 즐겨 입는다. 때로 경찰처럼 입는다. 경찰을 기다리지도 무서워하지도 않는다. 대신 경찰의 일을 한다. 그리고 그들은 무표정에 익숙하다. 말이 적다. “씨발” “씨발” “씨발”을 자주 입에 담는다. 설명하지 않는다. 설명은 그들의 업무가 아니다. 철거와 관련된 일은 전혀 하지 않지만, 그들은 철거 용역이라 불린다. 그래서 폐자재를 분해하고 수거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명함을 건넬 때마다 난감해진다. 그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당신이 불법을 저질렀다고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들이 고용되었을 리가 없다고 믿는다. 무엇보다 그들은 불법을 저지른 사람을 폭행하면 합법이라고 믿고 있다. 고용주들은 오로지 그 믿음만을 믿고 그들을 고용했다. 그리고 그들은 믿음을 배반해본 적이 없다.
저 희한한 공간의 값
항공모함에서 초급장교에게 배정되는 방은 핵잠수함의 함장실보다 넓을 수도 있다. 몸 하나 겨우 누일 수 있는 공간을 여객기로 옮기면 권력이나 부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징그럽게 포개져 있는 아파트의 시각적인 이미지는 ‘개성 없고 삭막한 현대 문명’을 자동으로 떠올리게 하지만, 막상 그 안에서 사는 삶은 겉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편안하다. 그래도 괴물 같은 아파트 사진을 볼 때면 다시 한번 삶을 되돌아보곤 한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출발해 어디로 가는 우주선을 타고 있기에, 이렇게 희한하게 생긴 공간을 동경해서 그 어마어마한 티켓 값을 기꺼이 내려고 하는 걸까?
비열한 욕심에 비명 지른 비자림
일어나버리고야 마는 일이 있다. 나는 일어나버린 일 앞에 일어선 사람을 본다. 죽음을 앞당기는 결정, 억지로 삶을 이어가는 순간들, 이미 늦어버린 수많은 일을 생각한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와 밑동의 스산함과 넓고 깊은 그늘 같은, 어쩔 수 없이 마음에 흔적을 남기고야 마는 것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너무’라는 말을 붙일 수 없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너무 살아 있는 생명, 너무 넉넉한 마음, 너무 집요한 용기 같은, 쓰러진 말들.
4대강 습지에 물이 말랐다
강은 문명의 기반이기 이전에, 개발과 성장의 거점이기 이전에 생명의 젖줄이었다. 인간은 강을 먹고 마시며 진화와 진보를 거듭했다. 그런데 생명의 강이 죽어가고 있다. 생산과 소비를 미덕으로 여기는 산업 문명이 주범이다. 아니, 풍요와 편리를 향해 질주하는 우리 모두가 공범이다. 강으로 대표되는 천지자연이 반격을 시작했다. 중금속과 방사성 물질에 이어 미세먼지가 매 순간 우리 몸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기후변화와 함께 재난이 일상화하고 있다. 시간이 많지 않다.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합의와 결단이 시급하다. 미래가 우리에게 묻는다. 계급, 인종, 젠더를 막론하고 우리 모두에게 캐묻고 있다. ‘인류는 어떤 미래를 원하는가.’ 우리가 이 물음에 답을 구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을 것이다.
얼어붙은 흐느낌
가슴이 부서져 내린 흔적 같은 저 결빙들 틈 사이로 지금 무엇이 보이는가? 이름 세 글자가 새겨진 작업복. 육개장 사발면. 홈런볼 과자. 홀로 사망한 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유품엔 이 외에도 사비로 산 손전등이 있었다. 자신의 안전을 지켜줄 어떤 물품도 충분히 지급받지 못한 채 그는 분진과 소음과 어둠 속에 혼자 있었다. “원청 애들은 잘 안 죽어.” 언젠가 한 비정규직 노동자가 했던 이 말이 2018년 겨울, 죽지만 않게 해달라는 흐느낌으로 반복되는 걸 듣는다. 망도 펜스도 없는 컨베이어벨트처럼, 안전과 생명을 비용이란 말로 돌린 채, 저 결빙들을 깔고서, 저 직선은 어디로 내달리고 있는가? 갈라지고 부서지는 것은 누구인가?